파괴와 혼돈을 업으로 삼는 여신은 순환의 완전한 종결을 위해 자신의 편린을 떨궈내 태초의 마족이라 불리는 존재를 창조했다. 그 중 가장 처음 눈 뜬 파편, 재앙의 화신인 그레모리는 선천적인 나태함으로 본의 아니게 물질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해왔다. 몸을 뒤척이는 것만으로 물질세계를 무너뜨릴 재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 작은 파편만으로 행동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큰 행운이었으며, 순환의 끝을 바라는 레아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용했다. 어찌 되었건 그레모리에게 순환의 끝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껏 가지게 된 자아, 기껏 가지게 된 삶을 순환의 톱니바퀴에 억지로 끼워 넣을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물질계에는 푹신한 이불과 자극적인 맛의 간식들, 기묘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창작물의 유혹으로 넘쳐나니 나태함을 뭉쳐 만들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그레모리에게 이런 달콤한 유혹들은 그녀를 더욱 나태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작게 잘라낸 아담한 육신으로 푹신푹신한 쇼파에 몸을 맡긴 채 오늘도 중얼거린다. '일... 하긴 할 거야... 달콤 살벌 깔깔 기동대 속편 나올 때까지만 버틴 다음에….'